매년 나토 정상회의 선언문 첫 줄에는 같은 문장이 들어간다. “회원국에 대한 공격은 전체에 대한
공격이다.” 헌장 5조, 집단방위 원칙이다. 늘 있던 관용구인데, 2026년 앙카라
정상회의에서는 그 문장이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가 뉴스가 됐다.1
미국이 유럽에서 전투기·군함·폭격기를 단계적으로 빼겠다고 공식화하면서, 당연했던 약속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된 탓이다. 게다가 이번 회의는 이례적으로 다음 정상회의 날짜조차 정하지 못한 채
끝났다. 이 글은 그 공백을 (1) 독일의 재무장, (2) 뒤집힌 냉전 공식과 나토 3.0, (3) 미국 없는
유럽의 취약점으로 나눠, 근거와 함께 짚는다.
리투아니아 숲속의 독일 전차

미국이 물러난 자리를 메우는 작업은 유럽 동쪽 끝에서 벌어지고 있다. 벨라루스와 국경을 맞댄
리투아니아에 독일 제45기갑여단이 배치됐다. 2025년 4월 창설된 이 부대는
냉전 종식 이후 독일이 처음으로 둔 해외 상설 전투부대다.2
훈련이 끝나도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현재 규모에서 2027년까지 약 5,000명으로
늘어난다.2 레오파르트 전차에 드론 정찰을 피하려 위장망을 씌우고
“오늘 밤이라도 싸울 수 있는 상태”를 목표로 훈련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극적인 장면이다. 80년 전 폴란드와 발트 3국을 짓밟았던 독일 전차가, 이번에는
그 땅을 지키러 돌아온 것이다. 독일의 변신은 병력에 그치지 않는다. 나토가 제시한
GDP 대비 국방비 목표를 시한(2035년)보다 6년 앞당겨 2029년까지 달성하겠다는
계획이며, 2030년 무렵 독일 국방비는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규모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뒤집힌 냉전 공식 — 그리고 나토 3.0
나토의 초대 사무총장 이즈메이 경은 동맹의 존재 이유를 한 문장으로 남겼다. “러시아는
밖으로, 미국은 안으로, 독일은 아래로.”3 러시아를 막고,
미국을 유럽에 붙잡아 두고, 독일의 재무장을 억제한다는 냉전의 공식이다. 지금은 이 공식이 뿌리째
뒤집히는 중이다. 미국은 발을 빼고, 독일은 다시 무장한다.
앙카라 회의는 새로운 역할 분담, 이른바 ‘나토 3.0’을 사실상 공식화했다. 재래식
방어는 유럽과 캐나다가 주도하고, 미국은 핵우산과 유사시 증원에 집중한다는 구상이다.
실제로 유럽 주둔 미군은 약 10만 명에서 8만 명 수준으로 줄었고, 미국은 5,000명 추가 철수를
발표했다.1 문제는 방향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미국은 유럽 주둔 규모를
다른 현안과 연계하겠다는 신호를 보냈고, 동맹의 안보가 협상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실제로 미국은 지난 5월 독일 총리의 비판 직후 5,000명 철수를 돌연 발표했고, 한
분석은 유럽이 마주할 미국의 얼굴을 ‘엄격한 보호자’부터 러시아와 함께 유럽을 위협하는 ‘포식자’까지
네 갈래로 정리했다. 아직은 다수가 미국을 보호자로 보지만, 반대쪽 그림자도 짙어지고 있다.
동맹 신뢰의 흔들림은 대만 안보에서 본 미국의 신뢰성 문제와도 겹친다.
수바우키 회랑과 미국이라는 ‘운영체제’

유럽 방위의 급소는 수바우키 회랑이다. 벨라루스와 러시아 역외 영토 칼리닌그라드
사이, 폭 약 65km에 불과한 이 통로가 발트 3국과 유럽 본토를 잇는 유일한
육로다.4 러시아가 발트 3국을 침공한다면 증원을 끊기 위해 가장 먼저
이곳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 이미 발트 3국은 사이버 공격·영공 침범·해저 케이블 파손 같은 ‘회색지대’
도발에 시달린다. 이에 나토는 전략을 바꿨다. 과거엔 후퇴 뒤 탈환이었다면, 이제는 처음부터
한 뼘도 내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동부전선 전투단은 4개에서 9개로 늘었고, 발트 3국과
폴란드의 국방비는 GDP 5%를 넘어설 전망이다.
그런데 근본적 질문이 남는다. 미국 없이도 유럽은 싸울 수 있을까. 런던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는 미국을 나토의 ‘운영체제’에 비유한다. 유럽이 병력·장비에서
러시아를 따라잡아도, 정보·위성·장거리 타격·전략 수송 같은 핵심 기능은 여전히 미국이 돌린다는
것이다. 미국이 빠지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병력이 아니라 통합성이다. 조기경보가
늦고 통신 신뢰성이 떨어지면 공군과 지상군은 사실상 따로 싸운다. 지난해 한 독일 언론이 후원한
워게임에서, 러시아가 수바우키 회랑을 점령하는 시나리오는 이 취약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유럽의 답 — 국방비와 ‘유럽산’ 무기
유럽의 대응 방향은 분명하다. 지난해 헤이그 정상회의 이후 유럽 회원국과 캐나다의 국방 투자는
약 1,390억 달러 늘었고, 앙카라에서 500억 달러 규모의 방산 계약이 새로 발표됐다.
특히 노후한 미국산 E-3 조기경보기를 스웨덴제 ‘글로벌아이’로 교체하기로 한 결정은 상징적이다 —
하늘의 눈까지 미국산에서 유럽산으로 바꾸겠다는 뜻이다. 독일은 2030년까지 나토에
10개 여단을 제공하기로 했고,6 발트 3국과 폴란드는
이미 국방비를 GDP의 5% 위로 끌어올렸다. 우크라이나 지원도 올해 700억 유로 규모로 구체화됐고,
현지에서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라이선스 생산하는 방안까지 거론됐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오래
붙잡아 둘수록 유럽은 그만큼 대비할 시간을 번다.
돈으로 못 메우는 두 공백 — 통합성과 핵우산

하지만 돈으로 메울 수 없는 공백이 둘 남는다. 첫째는 앞서 말한 통합성이다.
독일 킬 세계경제연구소는 유럽 나토 회원국들이 미국을 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은 국방비를 쓰면서도,
작전의 전 과정에서 미국에 의존한다고 지적한다. 둘째는 핵우산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가진 핵탄두는 각각 200여 기로, 수천 기를 가진 미국·러시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5
“미국이 재래식 병력조차 보내기 싫다는 신호를 보낸다면, 핵전쟁의 위험은 감수할 것이라 어떻게
믿겠는가”라는 물음이 유럽 안에서 나온다. 이 딜레마는 핵우산과 확장억제를 고민하는 다른 동맹들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결론 — 시간은 유럽의 편이 아니다
한 싱크탱크는 이번 회의를 이렇게 요약했다. “더 강한 유럽, 그러나 더 약한 나토.”
유럽의 재무장이 나토의 결속 약화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폴란드 외무장관은
과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유럽은 미국만큼 강해질 필요는 없다. 단지 푸틴보다 잘하면 된다.” 맞는
말이지만, 그 시험이 언제 닥칠지는 유럽이 정할 수 없다. 앞으로 지켜볼 지표는 이렇다.
- 미군 추가 감축 규모와 속도, 그리고 안보-현안 연계 여부
- 독일의 2029년 국방비 목표 이행과 리투아니아 여단 증강
- 동부전선 전투단·발트 3국 국방비(GDP 5%+)의 실제 집행
- 정보·위성·장거리 타격 등 미국 의존 기능의 유럽화 진척
- 영·프 핵우산의 유럽 확장 논의
다음 만날 날짜조차 정하지 못하고 헤어진 동맹. 앙카라에 모였던 32개국에게, 시간은 유럽의 편이 아니다.
- 미국의 유럽 주둔군 5,000명 감축·추가 감축 전망, 유럽 주둔 미군 규모 축소.
Stars and Stripes ·
TIME - 독일 제45기갑여단(리투아니아 여단) 2025년 4월 창설·약 4,800~5,000명 상설 배치.
Wikipedia — 45th Panzer Brigade - 이즈메이 경 “Russia out, America in, Germany down” — 나토 설립 취지.
Wikipedia — Lord Ismay - 수바우키 회랑(폭 약 65km) — 발트 3국과 유럽 본토를 잇는 유일 육로.
Wikipedia — Suwałki Gap - 영국·프랑스 핵탄두 각각 약 200여 기 vs 미국·러시아 수천 기.
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 - 독일의 2030년 나토 10개 여단 제공 계획 등 유럽 방위 태세.
GLOBS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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