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의 한 발굴 현장. 1,400년 전 왕궁의 화장실로 추정되는 구덩이(인체 기생충알이
검출됐다) 바닥에서 납작하게 눌린 22.4cm 대나무 조각 하나가 나왔다. 금관도 도자기도
아닌 부러진 대나무 토막. 그런데 여기에 엑스레이를 통과시킨 순간 학계가 뒤집혔다.
삼국시대 700년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실물로 나온 적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1) 사라졌던 ‘백제의 소리’, (2) 화장실이 만든 타임캡슐, (3) 피리보다 더 큰 발견인 목간을
순서대로, 출처와 함께 정리한다.
복원할 수 없던 하나 — ‘소리’
우리는 삼국시대를 꽤 안다. 금관을 보면 신라 왕의 위엄을, 고분 벽화를 보면 고구려 사람들의 옷차림과
사냥 장면까지 그려볼 수 있다. 그러나 절대 복원할 수 없는 영역이 하나 있었다. 바로
소리다. 유물은 땅에 묻혀 화석처럼 남지만, 소리는 공기 속으로 사라지면 그걸로 끝이다.
백제가 ‘음악의 나라’였다는 정황은 차고 넘친다. 옛 기록에는 백제의 피리와 거문고 같은 악기가
등장하고, 일본 역사서에는 백제인 미마지가 바다를 건너 음악과 가면극을 가르쳤다는
기록까지 있다. 백제 음악이 고대 일본 궁중 예술의 스승이었다는 뜻이다. 1993년 부여 능산리에서 나온
국보 금동대향로의 다섯 주악상은 백제인이 실제로 어떤 악기를 연주했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정작 그 소리를 냈던 악기의 실물은 백제도, 고구려도, 신라도 단 한 점 없었다.
나무·대나무·가죽 악기는 천년 앞에서 모두 흙으로 돌아갔고, 삼국시대 관악기는 그림과 글자 속에만
존재하는 ‘소리 없는 유령’이었다. 형태를 몰라 소리를 못 냈고, 소리를 몰라 그 시대의 정서를
온전히 상상할 수 없었다. 유물 하나가 채우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 시대의 감각인 셈이다.
엑스레이가 밝힌 정체 — 백제의 가로 피리

발견지는 백제가 538년 수도를 사비(지금의 부여)로 옮긴 뒤 멸망까지 120년을 보낸
관북리 유적이다. 1982년부터 44년째 발굴이 이어지는 사비 왕궁터의 유력 후보로,
왕과 신하가 국정을 논하던 건물로 추정되는 자리 근처에서 이번 대나무가 나왔다.1
육안으로는 정체를 알기 어려웠지만, 표면에 사람이 일부러 뚫은 구멍 네 개가 일렬로
남아 있었다. 자연적으로 생길 수 없는 배열이다. 엑스레이 분석 결과는 분명했다 — 입김을 넣는 취공,
손가락으로 짚는 지공, 한쪽 끝이 막힌 구조. 세로로 부는 피리가 아니라 가로로 들고 연주하는
횡적(가로 피리)이었다.1 오늘날 국악 대금·중금·소금으로 이어지는
대나무 관악기의 조상뻘인 셈이라, 국악의 뿌리를 추적하는 단서가 된다. 탄소연대 측정은
568~642년, 무왕·의자왕이 살던 바로 그 시대를 가리켰다. 삼국시대 관악기 실물이 나온
첫 사례이자, 기록에만 있던 백제 횡적의 실체가 처음 드러난 순간이다.
화장실이 만든 타임캡슐

대나무는 원래 천년을 버티는 재질이 아니다. 유기물은 흙 속 미생물의 먹이가 되어 대부분 썩는다.
삼국시대 악기가 지금껏 하나도 남지 않은 이유다. 그런데 이 피리는 살아남았다. 비결은 역설적이게도
그 구덩이에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진흙이 산소를 차단해 미생물의 활동을
멈춰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1,400년짜리 진공 포장이었다. 고고학에서 물에 잠긴 저습지
진흙이 종종 최고의 보존 환경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유물에게 최악처럼 보이는 왕궁 화장실
진흙 바닥이, 사실은 최고의 타임캡슐이었던 셈이다.
이 피리가 왜 거기 있었는지—악사가 실수로 빠뜨렸는지, 금이 가서 버렸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1,400년 전 누군가의 사소한 순간 덕분에 백제의 소리가 우리에게 도착했다는 사실이다.
연구소는 피리의 재현품을 만들어 공개했고, 구멍 위치와 관의 굵기로 음높이를 추정하는 백제 궁중음악
복원 연구가 시작됐다. 다만 소리 복원은 재질과 구멍으로 음을 추론하는 작업이라, 백제인이 실제 들었던
소리와 완전히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피리보다 큰 발견 — 목간 329점

사실 이 발굴에는 피리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자료가 쏟아졌다. 같은 유적의 수로에서 나온
목간 329점이다. 목간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 나무 조각에 글씨를 쓴 것으로, 한 유적에서
나온 수량으로는 국내 최다다.2 내용도 놀랍다. 한 목간에는
“공적이 넷인 도족을 소장군으로 삼다“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 1,400년 전 백제
인사 발령 문서의 실물이다. 역사서의 백제 16관등 어디에도 없는 관직명과, 기록에 없던
지명들이 튀어나왔고, 약재 이름과 음악 관련 단어까지 적혀 이 일대가 문서를 쏟아내던 행정관청
이었음을 보여준다.
목간을 끈으로 엮어 책처럼 만든 편철 목간 6점(국내 최초)도 나와, 종이책 이전에 백제인이
문서를 어떻게 묶고 보관했는지가 처음 확인됐다. 그동안 일본에서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던 한자가 백제
목간에서 확인돼, 문자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경로를 다시 따져보게 만든다.
무엇보다 목간에는 540·543년 기록이 담겨 있었는데, 이는 사비 천도(538년) 직후다.
역사서에 단 한 줄로만 남았던 그 시대가, 당사자들이 직접 쓴 수백 장 문서로 되살아난 것이다.
기록을 넘어 실물로 — 한·중·일이 모였다
백제 음악이 바다 건너 일본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오래됐지만, 늘 ‘기록 대 기록’이었다. 이제
실물 대 실물로 따질 수 있게 됐다. 지난달 부산에서는 한국·중국·일본 연구자들이
이 피리와 목간을 놓고 국제 학술대회를 열었고, 백제 횡적을 일본 고대 횡적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발표가 이어졌다. 미마지가 일본에 음악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마침내 악기의 형태와
구조로 검증될 길이 열린 것이다. 하나의 유물이 한 나라의 역사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음악사
전체의 퍼즐 조각이 된 셈이다. 그 뿌리를 파고들면, 오늘 우리가 듣는
고대 한국인의 문화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도 다시 보이게 된다.
결론 — 국보가 아니라 ‘버려진 것’이 말한다
묘한 일이다. 백제의 위엄을 보여주는 금동대향로 같은 국보급 걸작이 아니라, 누군가 잃어버린
피리 한 자루와 관청이 쓰고 버린 메모 뭉치가 1,400년 뒤 우리에게 가장 큰 이야기를 건넸다.
역사는 종종 왕의 무덤이 아니라 일상의 쓰레기에서 더 정직하게 드러난다. 앞으로 지켜볼
지점은 이렇다.
- 재현품·음향 분석을 통한 백제 궁중음악 복원의 진전
- 한·중·일 횡적 비교 연구(백제→일본 전파의 실물 검증)
- 목간 판독으로 드러날 새 관직·지명과 사비 초기 백제사의 재서술
그림으로만 존재하던 악기가 손에 잡히는 실물이 됐고, 한 줄짜리 역사가 수백 장의 문서를 얻었다.
백제의 소리는 아직 완전히 들리지 않지만, 그 실마리는 이제 우리 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