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지금 몇 시인지 궁금할 때 어떤 방법으로 시간을 확인하시나요? 아마 대부분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현재 시각을 확인할 겁니다. 실제로 요즘 10대들 중에는 아날로그 시계를 읽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변화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시계는 언제나 인류 기술의 최첨단에 존재했던 물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시간을 지배한 인류의 위대한 여정: 시계의 역사 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현재는 시계가 휴대폰의 수많은 기능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전 세계가 정확한 시간으로 동기화되어 있다는 사실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더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을까’라는 문제는 수천 년간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도전 과제이자 난제였습니다. 이러한 시계의 역사 속에는 인류 과학과 기술 발전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시간을 지배하려던 인류의 위대한 여정을 함께 탐험해 봅시다.

시간의 본질과 고대인의 도전
시간은 공간이나 질량처럼 우리 우주에 내재된 근본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인지하든 하지 않든 시간은 끊임없이 흐릅니다. 이것은 우주의 탄생 이래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간은 고대인들에게 매우 어려운 개념이었습니다. 길이와 무게 같은 것들은 척도를 기준으로 직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량화하기도 비교적 쉬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는 특성 때문에 ‘이만큼이 이만큼이다’라고 딱 정하기 어려웠습니다. 시, 분, 초와 같은 정밀한 단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해가 뜨고 지면 하루가 지났고, 계절이 한 바퀴 돌면 한 해가 지났다고 크게 파악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고대인들은 이렇게만 시간을 받아들여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농사짓거나 사냥하고 전쟁하는 정도의 활동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대략 해가 언제 뜨고 지는지, 여름과 겨울이 언제 오는지 아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집단의 규모가 점차 커지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더욱 정확한 시간 개념이 필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동틀 때, 해가 중천에 떴을 때, 해가 기울 때를 기준으로 하면 하루를 겨우 세 시점으로만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런 대략적인 구분 대신, ‘내가 동틀 때부터 정오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정확히 알아낼 필요가 생겼습니다.
종교가 생기고 물물 교환이 활발해지면서 언제 신전에 예배를 드리고, 누구와 언제 만나 거래할지 대략적으로라도 정해야 사회가 원활히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인류는 우주의 근본 원리로서의 시간이 아닌, ‘지금이 몇 시냐’라는 개념에서 인위적으로 나눈 ‘시각’이라는 개념을 발명했습니다.
최초의 시간 측정 도구: 해시계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는 동시에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개념이었습니다. 이 시점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표준화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때문에 고대 이래 수천 년간 인류는 이 시각을 측정하고 표현하는 장치, 즉 시계를 만들고 계량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시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당연히 해시계였습니다.
천구 위를 일정한 주기로 운행하는 태양은 고대로부터 시간 측정의 근본 기준으로 여겨졌습니다. 단순히 나무나 돌을 세워놓고 주변에 눈금을 그려놓으면 태양을 직접 관찰하는 것보다 그림자의 길이와 방향을 통해 더 정확하게 시간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해시계는 고대 이집트, 그리스, 바빌로니아 등 여러 고대 문명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사용되었습니다. 태양과 그림자만 있으면 작동하고, 별도의 동력원이 필요 없다는 장점 덕분에 바닥에 막대 꽂은 모양이나 그릇 모양부터 심지어는 탑이나 건물 형태까지, 역사상 아주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천구 상에서 태양은 하루를 넘어 1년을 단위로 정해진 경로를 이동합니다. 충분한 천문학 지식이 있었다면 해시계를 통해 하루의 시점뿐 아니라 1년 중의 절기까지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거석 유적인 스톤헨지도 그림자를 통해 동지와 하지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성될 때부터 일종의 달력 기능을 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가설이 유력합니다. 조선 세종대 장영실이 만든 ‘앙부일구’ 역시 전형적인 달력 겸 시계입니다.
그림자가 가리키는 눈금을 통해 시간뿐만 아니라 절기까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계열에서는 거의 끝판왕급으로 기술을 발전시킨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휴대가 가능한 소형 버전도 만들어져서 방위만 잘 맞춰 사용하면 되었습니다.
밤낮 없는 시간 측정: 물시계의 진화

그러나 해시계는 날씨가 흐려 태양이 보이지 않거나 밤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태양 주기에 무임승차하는 ‘개꿀템’이었지만, 해가 떠 있을 때만 유효했죠. 하지만 인류는 언제나 답을 찾아냅니다. 밤낮 상관없이 활용할 수 있는 자연의 힘은 무엇이 있을까? 여기서 인류가 찾아낸 답은 바로 ‘중력’이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탄생한 물건이 ‘물시계’입니다. 중력으로 인해 물이 흘러내리는 원리, 즉 위치 에너지를 활용하여 일정한 용기에서 물이 비워지거나 채워지는 것을 통해 시간을 측정하는 기구였습니다. 원리가 직관적이어서 물시계 역시 기원전 고대 문명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었습니다.
다만 물시계는 해시계와 달리 시대가 지날수록 점점 ‘오버 테크놀로지’급 물건으로 발전합니다. 근본적으로 동력원이자 측정 매개체인 물을 끊임없이 보충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수위에 따라 유압이 변화하며 물의 유출 속도에 오차가 발생한다는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정하고 더욱 정확한 물시계를 만들기 위해 당대의 온갖 최첨단 기술과 과학이 총동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시간에 맞춰 북을 치거나 노래가 나오는 알람 기능을 갖춘 물건까지 등장했습니다.
이쯤 되면 물을 동력으로 삼아 움직이는 오토마타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분야의 끝판왕은 송나라 시대 개봉부에 설치된 ‘수운 의상대’입니다. 높이만 무려 12미터에 달하고, 꼭대기에는 20톤 가까이 나가는 혼천의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때에 맞춰 시간은 물론 별자리의 이동까지 추적하여 알려주는 시계 겸 천문 관측대였습니다. 무력을 이용해 물탱크의 수위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고 유압을 안정화시켜주는 밸브 장치부터 원시적인 형태의 체인 드라이브 등, 현대 기준으로 보아도 정교한 기계 공학이 총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혁신적이었던 것은 바로 ‘탈진기(이스케이프먼트)’가 탑재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탈진기란 쉽게 말해 톱니바퀴의 연속적인 움직임을 불연속적으로 만들어 가속되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게 강제하는 장치입니다. 이 덕분에 시간의 흐름을 일정하게 분절하고 수치화하며 측정할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북송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파괴되어 실물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세한 구조와 원리가 잘 기록되어 있어 한참 후대인 조선 시대에 장영실이 자격루를 만들 때도 이 수운 의상대의 원리를 참고했습니다. 따라서 물시계 계열에서는 최종 테크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기계식 시계의 등장과 시계탑의 시대

아무리 물시계가 정교하게 발전했더라도 치명적인 단점은 물이 있어야만 움직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마찬가지로 중력에 맡겨 흐르게 할 수 있는 몇몇 물질들, 예를 들어 액체 수은이나 고운 모래 등을 이용한 시계들도 등장했습니다. 심지어 향을 태워서 시간을 재는 향시계, 양초를 태워서 시간을 재는 불시계 등도 널리 사용되었죠. 하지만 모래시계는 입자들의 정체 현상 때문에 오차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정밀화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향시계나 불시계도 같은 면에서 한계점이 명확했기에 단순히 휴대용 타이머 역할에 머물렀습니다. (수은 시계는 써봤던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 것은 13세기 말 유럽에서였습니다. ‘꼭 유체를 써야 하는가? 그냥 고체를 쓰면 안 되는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위치 에너지를 이용하되 긴 줄에 무게추를 달아서 이 무게로 톱니바퀴를 돌리자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사실 이 전까지 유럽에서는 아직 부력을 이용하는 고전적인 물시계나 양초를 이용하는 불시계가 주류였습니다. 중국인들처럼 물시계 테크트리를 끝까지 찍지 않고, 곧바로 기계 장치로만 움직이는 단계로 넘어간 것입니다.
마침 이때 유럽은 흑사병이 휩쓸고 간 직후라 부족해진 인력 대신 기계를 활용하는 것이 일종의 트렌드였습니다. 그런데 추는 한 번 떨어뜨리면 끝이 납니다. 물처럼 유량을 조절할 수 없는데 이걸로 어떻게 시계를 만든다는 걸까요? 여기서 다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탈진기’입니다. 앞에서 송나라 시대에 이미 등장했던 바로 그 장치입니다. 에너지의 방출 속도를 일정하게 제어한다는 점에서 탈진기가 있다면 기계식 시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은 추 낙하식 시계와 유럽식 탈진기의 발명부터를 진정한 의미의 기계식 시계라고 부릅니다.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명되어 세부적인 작동 원리에 차이가 있었고, 무엇보다 물이라는 동력 전달 매개체를 따로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추 낙하식 시계가 중국식 물시계의 완벽한 상위 호환은 아니었습니다. 추를 사용하면 물을 이용할 때보다 불편한 점도 많았습니다. 물탱크에 틈틈이 물을 보충하면 알아서 계속 흐르며 톱니를 돌리지만, 추는 줄이 다 풀려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때에 맞춰 다시 감아줘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추를 오랫동안 낙하시키려면 충분한 공간, 즉 높이가 확보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시계가 위아래로 길쭉해지는 형태가 됩니다. 이때부터 유럽의 ‘시계탑’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길쭉하게 만드는 김에 그냥 높은 건물에 추를 매달아 멀리서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시간이 되면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며 온 동네가 공용으로 사용하게 되었죠. 아무래도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수준의 공학 역량이 필요한 물건이었기에, 시계탑은 주로 장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자유도시 위주로 성당이나 광장을 중심으로 설치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우리 도시의 기술 수준이 이렇게 높다’는 것을 자랑하는 역할까지 했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랜드마크로 인식되곤 했습니다。
근대 시계의 혁명: 갈릴레이와 진자 시계
‘특이점이 왔다! 기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초기의 기계식 시계는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앞에서 보여드린 초기형 탈진기는 ‘머지 탈진기’라고 불렸습니다. 이는 톱니바퀴에 걸린 회전력으로 탈진기를 직접 밀어내는 식으로 작동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동력의 미세한 출력 변화, 마찰력, 장치의 마모 등으로 인해 정확성이 쉽게 틀어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실 물이 필요 없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두 세기 전 송나라 시대에 사용되던 원시적인 탈진 장치에서 그렇게 크게 발전한 형태라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시계는 하루에 10분, 심한 경우에는 15분 정도까지도 오차가 생겼습니다. 결국 해시계나 물시계를 이용해 수시로 시간을 동기화해 주어야만 했습니다. 당연히 분 단위부터는 정확성을 담보하기 어려웠고, 초 단위부터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뭔가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입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와 같은 전설적인 일화 외에도 갈릴레이가 남긴 엄청난 업적이 따로 있습니다. 그는 물체가 낙하할 때 그 무게와 상관없이 모두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진자의 등시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어떤 물체가 고정된 축에 매달려 흔들릴 때, 매달려 있는 물체의 무게나 진동의 폭과는 상관없이 축으로부터의 거리만 동일하다면 그 왕복 주기도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부정확한 이론이라 오차가 발생하지만, 대략 5도 정도 각도 내외에서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활용하여 시계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후죽순 등장했습니다.

1656년 네덜란드의 과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최초로 특허를 낸 것을 시작으로, 거의 비슷한 시기인 1657년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훅에 의해 ‘앵커 탈진기’가 발명됩니다. 앵커 탈진기는 진자를 닭 모양의 지렛대에 매달아 진자가 한 번 왕복할 때마다 ‘똑딱’하며 톱니를 두 번 전진시키도록 한 새로운 탈진기였습니다. 기존의 버지 탈진기와는 달리 진자가 스스로 진동하며 톱니를 막았다 풀었다 했기 때문에 톱니바퀴의 회전력이 탈진기에 주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하루 오차 범위를 10초 수준까지 획기적으로 줄였습니다. 이후 1670년 이를 한 번 더 개량한 ‘데드비트 탈진기’가 발명되면서 탈진 과정에서 발생하는 반동까지 잡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덕분에 하루 오차가 1초 수준으로 한 단계 더 개선되었고, 시분 단위뿐만 아니라 초 단위까지도 유의미하고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사실 이 시점에서 기계식 시계의 기본 원리는 거의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더 작고 정밀하게: 휴대용 시계와 항해의 시대
오늘은 시간을 지배한 인류의 위대한 여정: 시계의 역사 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시계를 ‘어떻게 하면 더 작게 만드냐’ 하는 것이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물론 진자 시계의 발명을 기점으로 시계 제작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시계의 크기는 성당과 광장의 시계탑뿐만 아니라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집안에 설치하는 수준까지 작아진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무거운 추와 진자를 이용하는 방식으로는 이 이상으로 작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휴대용으로는 여전히 향시계나 모래시계 같은 것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당시는 ‘대항해 시대’였습니다. 유럽의 웬만한 나라들이 새로운 땅과 바다를 발견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 때문에 무엇보다도 ‘항해용 시계’의 개발이 시급했습니다. ‘배에서 시계가 왜 필요할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 위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정확한 시간을 아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평으로 이동하는 동시에 수직으로도 흔들리는 배 위의 극한 환경에서는 당시 기술로 아무리 좋은 시계라 할지라도 시간이 금방 틀어져 버리는 난점이 있었습니다. 즉, 바다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인류는 깨달았습니다. 이 시점 이후 시계 기술의 목표는 ‘항해용 정밀 시계’로 맞춰지게 됩니다. 시간 측정 기술의 발전은 단순히 정확성을 넘어 인류의 삶과 문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시간을 더 잘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인류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에 우리는 지금의 편리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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