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의 덫: 한국인 관광객의 환상과 일본인의 냉혹한 현실
최근 일본 여행을 다녀온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물가가 싸다’고 입을 모읍니다. 엔화 약세(엔저) 덕분에 환전 부담이 줄어들어 체감 물가가 저렴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하지만 과연 일본 현지인들도 같은 생각일까요? 안타깝게도 답은 ‘아니오’입니다. 오늘은 한국인 시선으로 본 일본 경제 현실: 엔저 착시 너머의 진실 을 알아보려합니다. blog.eomeo.net에서 한국인 여행객의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 일본 경제의 숨겨진 단면을 심층 분석합니다.
30년 정체된 월급, 높아지는 세금 부담: 일본인의 삶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기간의 경기 침체를 겪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인들의 월급은 거의 오르지 않았고, 최근 물가가 상승하면서 실질 임금은 오히려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중위 연봉은 큰 차이가 없지만, 실수령액을 비교하면 일본이 훨씬 적습니다.

예를 들어, 연봉 4천만 원을 기준으로 한국은 실수령액이 약 290만 원인 반면, 일본은 약 260만 원에 불과합니다. 한 달에 30만 원이라는 차이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이는 일본의 세금 및 공공요금 부담이 한국보다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소득의 약 47%가 세금과 공공요금으로 지출되는 반면, 한국은 약 40% 수준입니다. 또한 한국에는 신용카드 사용액에 대한 소득공제와 같은 다양한 세금 공제 제도가 발달했지만, 일본은 이러한 제도가 미비하여 실질적인 세금 혜택이 적습니다.

저축의 나라에서 투자로: 변화하는 일본인의 재테크
오랫동안 일본인들은 ‘저축의 민족’으로 불렸습니다. 전체 가구의 절반 이상이 여유 자금을 은행 예금에 맡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미국(약 15%)이나 유럽(약 35%)과 비교할 때 매우 높은 수치입니다. 그러나 저금리 장기화와 실질 임금 하락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최근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투자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주식, 가상화폐 등 다양한 자산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는 더 이상 저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투자를 통해 자산을 증식하려는 노력이 일본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관련글: 비트코인 상승세 숨고르기 투자기회인가)
알뜰한 소비 습관: 세일과 포인트, 그리고 동키호테
경제적 압박은 일본인의 소비 습관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과거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세일 기간’의 풍경이 이제는 일상화되었습니다. 마트나 백화점 지하 식품 코너에서 파격적인 할인이 시작되면, 개점 전부터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츠메’라고 불리는 이러한 세일 문화는 일본인의 절약 정신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동키호테와 같은 할인 잡화점은 이제 외국인 관광객뿐만 아니라 일본 현지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쇼핑 장소가 되었습니다. 소득 수준에 따라 백화점 지하와 같은 고급 식료품점, 중위권 마트, 그리고 다이소 같은 저가 상점으로 소비층이 나뉘는 것도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일자리 시장과 최저임금의 양면성
일본은 일자리가 많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또 다른 현실이 보입니다.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3D 직업(Difficult, Dangerous, Dirty)이 많으며, 이러한 일자리는 주로 외국인 노동자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와 같은 곳에서 외국인 직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반면, 일본인이 선호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경쟁이 매우 치열하여 진입 장벽이 높습니다.
최저임금 또한 한국과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일본은 지역별로 최저임금이 상이하며, 도쿄가 가장 높고 오키나와가 가장 낮습니다. 그러나 도쿄의 최저임금조차 한국의 평균 최저임금보다 약간 높은 수준에 그칩니다. 특히 조선업과 같은 분야에서는 한국의 시급이 일본보다 높아, 일본인 노동자들이 한국으로 취업을 고려하는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이 1인당 GDP를 끌어올리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엔저와 ‘사나에노믹스’의 그림자
최근의 엔저 현상은 다카이치 정권이 추진하는 ‘사나에노믹스’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베노믹스의 뒤를 잇는 이 정책은 엔화 가치를 낮춰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고 국내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엔저가 지속되면 일본 기업들의 수출은 증가하고, 이는 단기적으로 경제 활성화와 고용 증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국민들이 보유한 자산 가치는 하락하고, 수입 물가가 상승하여 서민 경제에는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엔저가 가져오는 양면적인 결과는 앞으로 일본 경제의 중요한 과제로 남을 것입니다.
아날로그 감성과 디지털 시대의 간극
서구권 사람들은 1980~90년대의 아날로그 감성이 남아있는 일본을 매력적으로 느끼기도 합니다. 디지털 전환과 IT화에 실패한 일본의 모습이 오히려 ‘마음의 여유’를 주는 요소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은 한국이나 미국과 달리 IT 분야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더디며, 여전히 현금 결제가 만연하고 디지털 시스템 도입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특성은 관광객에게는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 환경 속에서 일본 경제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의 삶을 선택한 이유: 지진 없는 안정과 합리적인 생활비
이 글에 참여한 교수님은 1988년 일본 거품 경제 붕괴 직전 한국으로 넘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타이밍이 좋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는 한국에서의 삶이 일본보다 좋은 점으로 ‘지진이 없다’는 점과 ‘합리적인 생활비’를 꼽았습니다. 특히 교통비는 일본과 비교했을 때 한국이 훨씬 저렴하며, 전반적인 물가 수준도 한국이 일본보다 낮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이러한 점들은 단순히 경제적인 수치를 넘어, 개인의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 미치는 요소들입니다.
결론: 엔저의 착시를 넘어 일본 경제를 바라보다
엔저로 인한 일본 여행의 즐거움 뒤에는, 자국민의 고통과 노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30년간 정체된 임금, 높은 세금 부담, 변화하는 소비 및 투자 습관,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과제들은 일본 경제가 직면한 현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한국인에게는 매력적인 엔저 현상이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인들의 복잡한 경제적 삶이 존재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계시다면, 이런 복합적인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함께 이해하고 경험한다면 더욱 풍요로운 여행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