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나라 대만, 그러나 가난한 국민의 역설
최근 대한민국은 환율 급등과 경기 둔화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1,500원을 바라보는 환율은 ‘이러다 대한민국 망하는 거 아니냐’는 걱정까지 불러일으키죠. 이런 상황에서 이웃 나라인 대만의 경제 호황 소식은 더욱 부럽게 들립니다. 지난 10월, 대만은 무려 226억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며 우리나라의 61억 달러를 크게 앞질렀습니다.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비율도 2010년 10%에서 현재 16%까지 증가했으며, 외환보유고는 GDP 대비 72%에 달하는 6천억 달러 수준으로, 한국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 모든 경제적 성장의 중심에는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 TSMC를 필두로 한 강력한 반도체 산업이 있습니다. 5년 만에 300% 이상 성장한 반도체 수출은 대만의 1인당 GDP(구매력평가 기준)를 호주, 독일, 일본보다도 높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하지만 이 화려한 경제 지표 뒤에는 대만 국민들의 희생과 독특한 경제 정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대만 경제 기적과 불편한 진실 탐구 에 대해 알아 보려합니다..
대만의 ‘반칙 플레이’ 통화 약세 전략

대만의 성공 뒤에는 서방 국가, 특히 미국이 ‘환율 조작’이라고 비판하는 ‘반칙 플레이’가 존재합니다. 대만은 과거 한국이 1970~9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수출이 가장 중요하다’는 기조 아래, 자국 통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통화 가치가 약세여야 달러 환산 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여 수출을 늘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이러한 통화 약세 정책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가 바로 ‘빅맥 지수’입니다. 이코노미스트지가 전 세계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지는 빅맥 가격을 비교하여 통화의 저평가 또는 고평가 여부를 측정하는데, 지난 10월 통계에서 대만 달러는 압도적으로 저평가된 통화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의 합리적인 경제 기준(경상수지 흑자 GDP 3% 적정)으로 보아도, 대만 달러는 약 24%~25% 정도 평가 절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는 대만이 인위적인 통화 약세를 통해 수출 경쟁력을 극대화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부국강병의 이면: 국민의 희생과 내수 침체

대만의 ‘수출 지상주의’와 인위적인 통화 약세 정책은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민의 삶에는 예상치 못한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대만 국민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축률(GDP 대비 약 39%, 중국과 유사)을 보이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달러를 펑펑 벌어들이지만, 안으로는 소비를 줄이고 저축에 집중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 결과, GDP에서 국내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8년 65%에서 현재 45%까지 급감했습니다. 이는 미국의 훨씬 높은 소비 비중은 물론, 일반적인 선진국의 60% 이상 기준에도 크게 못 미치는 수치로, 중국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즉, 경제 규모는 커졌지만 국민 개개인의 실질적인 생활 수준은 크게 향상되지 못한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저임금 구조’입니다. TSMC의 초봉이나 타이베이 대학 교수들의 급여가 한국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점은 대만 전체의 저렴한 물가와 직결됩니다. 1998년 이후 대만의 노동 생산성은 두 배 이상 증가했지만, 임금은 이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는 실질적인 임금 삭감으로 이어져 국민들의 구매력을 약화시켰습니다. 단위 노동 비용 역시 25% 하락했는데, 이는 노동자들이 경제 성장의 몫을 제대로 분배받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2000년대 중후반 미국의 셰일 혁명과 함께 단위 생산 비용이 감소했던 시기에 미국과 대만 두 나라에서만 볼 수 있었던 특이한 현상입니다. 국민들이 돈을 쓰지 않고, 주머니에 돈이 없다 보니 물가는 저렴하게 유지되지만,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집값은 무섭게 치솟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달러가 대만 달러로 전환되면서 통화량이 증가하고, 이것이 주택 가격 급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중위 소득으로 주택을 구입하는 데 걸리는 기간을 비교하면 타이베이는 서울, 뉴욕, 런던보다도 더 높으며, 지난 25년 사이에 집값이 4배 이상 급등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국민들의 주머니는 얇아지는데 집값은 폭등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인 것입니다.

중앙은행과 생명보험사의 그림자 역할

대만의 통화 약세 정책은 단순히 정부의 의지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만 중앙은행(CBC)은 외환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수출 경쟁력을 유지해왔습니다. 과거 2012년까지는 들어오는 외화를 해외 투자 명목으로 적극적으로 빼돌려 환율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환율 조작국’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직접적인 외환 보유고 축적 방식은 어려워졌습니다.
이때 등장한 ‘대타’가 바로 대만 생명보험 회사들입니다. 대만 국민들이 저축과 함께 생명보험 가입률이 매우 높아 (1인당 평균 2개 이상) 보험사들은 막대한 재원을 보유하게 됩니다. 이 자금은 대만 국내에서는 안정적인 수익을 내기 어려웠고, 자연스럽게 해외 투자, 특히 미국 국채와 같은 달러 자산 투입으로 이어졌습니다. 보험사들의 해외 자산 투자는 결국 자국 통화의 약세를 유도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실제로 지난 15년간 대만 보험사의 해외 자산 비중은 전체 자산의 69%까지 급증했으며, 중앙은행의 해외 자산 비중은 오히려 감소했습니다. 현재 대만의 해외 자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생명보험 회사들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해외 투자가 막대한 환율 변동성 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험사 입장에서는 계약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돈이므로 안정적인 수익 확보가 필수적입니다. 이를 위해 ‘환 헤지’를 활용하지만, 대만 외환 시장 규모가 작아 헤지 비용이 매우 높습니다. 이때 중앙은행이 다시 등장합니다. 중앙은행은 시중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파생 상품(스왑 거래)을 통해 보험사들에게 환 헤지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파생 상품 거래는 장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 ‘부외 상품’의 성격이 강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현재 약 770억 달러 규모로 추정됩니다. 중앙은행이 리스크를 짊어지면서까지 해외로 자산을 빼돌려 자국 통화 약세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약 2천억 달러 규모의 해외 자산은 헤지되지 않은 채 환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는 대만 GDP의 25%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대만의 고집, 그리고 미국의 ‘동아줄’
대만이 이처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저환율 구조를 고수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해 IMF 회원국이 아닙니다. 비상시 도움을 줄 국제기구가 없다는 불안감에 대규모 외환보유고를 축적하려 합니다. 한국의 IMF 외환위기를 보며 ‘외환보유고가 중요해’라는 교훈을 얻었다는 논리도 펼칩니다. 둘째, 대만 수출 기업들의 강력한 로비 때문입니다. TSMC와 같은 첨단 산업뿐만 아니라, 나사(볼트) 제조업처럼 저임금, 저기술로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는 산업들이 대만 제조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많은 고용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낮은 환율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므로, 대만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셋째, 대만 중앙은행의 강력한 독립성입니다. 대만 중앙은행은 정부 예산의 6~15%를 배당금으로 제공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총재의 권한이 매우 강해 독자적인 통화 정책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대만의 저환율 구조는 국제 사회에서 더 이상 용인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통화 절상 압력이 높아지고, 쌓이는 돈 문제와 해외 투자 불일치 리스크가 커지면서 현 상태 유지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이 대만에게 ‘동아줄’을 내려주었습니다. 4천억 달러 규모의 미국 투자를 요구한 것입니다. 한국이 연간 200억 달러씩 투자하며 환율 상승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것과 달리, 대만은 ‘저희는 4천억 달러나 투자해야 하니 환율이 초약세로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라고 국제사회에 항변할 명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는 대만 수출 기업들이 앞으로도 상당한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할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한국에 던지는 시사점: 지속 가능한 경제 모델은?
오늘은 대만 경제 기적과 불편한 진실 탐구 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한국도 대만처럼 저환율 정책을 추구해야 할까요? 전문가들은 이것이 ‘국민들이 불행해지는 길’이라고 경고합니다. 대만은 에너지와 식량을 대부분 수입하는 나라입니다. 통화 가치가 계속 약세면 수입 물가가 치솟아 저소득층의 생계에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돈 많은 사람들을, 가계가 기업을 지원하는’ 역설적인 구조를 고착화시킵니다. 현재 대만의 경제 모델은 지속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외부의 비판이 커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제시한 4천억 달러 투자는 대만에게는 당장의 외압을 피할 기회가 될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국민들의 고통이 지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합니다.
대한민국처럼 1,500원 환율에 온 나라가 걱정하고 국민연금과 증권사 관계자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는 것이 옳은 방향일까요, 아니면 대만처럼 국가 경제 성장을 위해 국민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옳은 방향일까요? 아마 두 나라 사이 어딘가에 가장 바람직한 환율 정책과 경제 모델이 존재할 것입니다. 환율은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한 국가의 경제 철학과 국민의 삶의 질이 얽혀 있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부자 나라이지만 가난한 국민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만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앞으로도 대만 경제와 관련된 소식을 통해 더 깊이 있는 인사이트를 제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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