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기 위한 역사 공부

나를 알기 위한 역사 공부 : 본연의 인간이란 것이 있는가

자본주의 역사 공부를 통해 인간을 알아가는 과정

오랫동안 손에 들고 있었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나의 견고한 사고에 강력한 펀치를 날린 책이다.
인간은 타고난 지각능력으로 자연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나 발전과 진보의 방향으로 세상이 변화되면서 인간의 삶의 방식도 달라졌다.
일리치는 자신이 어떤 능력을 지닌 존재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지금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의 이야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진보와 발전으로 굴러가기 전의 인간과 나를 다른 종처럼 느껴지게 했다.
원래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모든 능력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고나 할까.
이러한 사고에 의한 균열은 삶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나름의 신념과 규범들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누군가 프로그램밍한 메뉴얼대로 움직이는 기계처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해를 공부하다 보니 공부하고 싶은 주제를 스스로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당시 이반 일리치 텍스트를 한참 읽던 터라 자본주의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자본주의를 형성한 기술이나 산업의 발전을 진보의 관점이 아닌 그 과정에 있었던 사람들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자본의 이익이 만들어 낸 호모 이코노미쿠스

자본하면 머릿속에 바로 연상되는 2가지가 있다.
‘돈’과 동시에 그 돈을 더 갖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이다.
이 시대는 우리가 호모 이코노미쿠스라고 정의한다.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종이라고 말이다.
이익의 극대화란 가장 적은 투입으로 가장 많은 산출을 낳는 것이다. 소싯적에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인간의 최고봉이라 여기기도 했다.
아마도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이 신봉하는 아담 스미스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는 경제를 움직이는 힘은 개인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이기적 욕망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세미나를 통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된 사실은 달랐다. 스미스가 말한 자기 이익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기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이기심은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는 범위 내에서만 허락했다.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은 개인의 이기심이 사회의 이익과 일치되는 지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스미스의 이론은 당시 사회 전체의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떤가? 자본가들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허락하는 신자유주의를 대표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누구 하나의 의도나 실수만으로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사회적·정치적·문화적·경제적인 모든 것들이 얽힌 결과로 드러나게 된다.
사건이란 우연이든 필연이든 ‘역사적인’ 조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자연적’인 것이 아닐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호모 이코노미쿠스라고 상정하는 것은 역사적인 조건에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할 뿐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중요한 점은 어쩌다 계산적인 합리성만으로 모든 일들을 판단하는 인간이 되었는지를 역사적인 조건에서 알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나를 알기 위한 역사 공부 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이제 아메리카 흑인들을 노예제라는 함정으로 몰아넣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그물을 보게 된다.
굶주린 정착민들의 필사적인 생존 욕구, 고향에서 쫓겨온 아프리카 흑인들의 무력감, 노예무역상과 농장주의 강력한 이윤추구, 가난한 백인들이 느낀 우월한 지위에 대한 유혹, 탈주와 반란을 위한 정교한 통제체제, 흑인과 백인의 협력에 대한 법적, 사회적 처벌 등이 그것이다.
(하워드 진, 『미국민중사』, 이후, 81쪽)

피의 역사, 미국 자본주의

올해 세미나는 유럽의 자본주의와 미국의 자본주의를 비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자리 잡는 것을 보면서 자본이 가진 권력의 막강함을 다시 깨달았다.
미국의 시작은 백인 자본가들이 자본의 힘으로 모든 유무형의 재산을 강탈하는 데서 출발한다.
인디언은 부족마다 각기 다른 전통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통일된 체제가 없었다.
소유에 대한 개념도 없었으므로 백인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사회를 설계하기 참으로 적합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버지니아에 정착한 백인들은 1609~10년 겨울 동안 ‘기아의 시간’을 겪었다.
끼니때마다 보리쌀 한 국자를 먹었고 정착민이 늘어나면 이마저도 먹지 못했다.
사람들은 땅을 파서 동굴 같은 구멍에서 사는 아주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이들이 살기 위해서는 “생존에 필요한 옥수수와 수출용 담배를 재배하는 노동력이 필요했다.”(58쪽)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 빈민으로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백인 빈민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자유민이 될 사람들이므로 새로운 노동력을 찾아야 했다.

답은 흑인 노예였다.
이미 1502년에 스페인 식민지에 흑인 노예가 들어온 후 부족한 노동력을 대신해 왔다.
초기엔 이들도 계약 노동자였다. 하지만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영구적 노예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인종을 기반한 노예제도는 합법화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인디언이나 백인은 왜 노예가 되지 않았을까?
인디언들이 백인에 의해 서부로 밀려나긴 했지만 아메리카는 여전히 그들의 땅이다.
나름의 생활방식을 유지할 여건이 된다. 백인 빈민은 어쨌든 백인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이었으므로 적응하는데 크게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흑인들은 달랐다.

“자기 땅과 문화에서 강제로 떨어져 나왔고, 정말로 비범한 끈기로 유지할 수 있었었던 잔존물 말고는 모든 언어, 의복, 관습, 가족관계 등의 유산이 하나둘씩 말살되어가는 상황으로 내몰렸다.”(60쪽)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흑인이 열등하기 때문에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농장의 이윤을 위해서 누구라도 노예로 만들어야 했고 가장 무력했던 흑인이 걸려들었을 뿐이다.
이제 피부색에 따라 백인은 주인, 흑인은 노예라는 인종적 증오심을 심어주면 된다.
기득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증오심은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인종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영구적인 노동력이 확보되었다고 해서 부유한 백인 자본가들이 근심 없이 이윤을 축적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늘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인디언, 백인 빈민, 흑인들이 결합하여 자신들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말이다.
1700년대 중반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이런 걱정은 더 격화되었다.
“식민지 엘리트들은 인디언의 적대행위와 노예 반란의 위험성에 더해 백인 빈민들의 계급적 분노까지 고려해야 했다.”(107쪽)

특히나 같은 활동 범위에 있는 백인 빈민과 흑인 노예의 결합은 기득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1679년 베이컨의 반란에서 이 두 집단의 결합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기득권이 만든 중간계급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을 해결할 답으로 식민지 엘리트들은 분열 정책을 내놓았다.
줄기차게 지속되었던 인디언 봉기와 백인 빈민과 흑인 노예 반란을 끊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서로를 억제하는 정책으로 노예 감시대를 설립한 것이다.
감시자는 가난한 백인이고 감시대상은 흑인 노예다.
흑인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얼마의 보수도 받는다.
함께 반란을 도모하던 가난한 백인은 이제 흑인 노예와는 다른 계급이 된 것이다.
이러한 계급적 멸시는 두 집단의 연대 고리를 잘라버리고 모두를 교묘하게 통제하는 장치 역할을 완벽히 해낸 동시에 지배자들의 위치까지 공고히 했다.
또 중요한 통제 장치가 하나 더 있다.

계급 간의 완충지대를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 성장으로 소농장주, 독립자영농, 도시 장인, 숙련 기능공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중간계급이 되어 상인 및 농장주들을 도와주는 대가로 작은 보수를 받았다.
이들의 계급 상승은 극빈층에게는 그들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되었다.
극빈층은 중간계급을 보면서 자본가들에 대한 불만을 잠재웠을지도 모른다.
중간계급은 극빈층과 상층계급의 직접적 충돌을 줄여주면서 지배 구조의 안정성을 증대시키는 도구 역할을 했다.

중간계급의 도움에 대해 상층계급이 베푸는 선의는 사실 자신의 부나 권력에 치명적 손상을 입힐 수 있는 백인 빈민, 흑인 노예, 인디언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간계층에게 그들의 선의는 너무나 감개무량한 것이여서 온맘으로 충성했다.
상층계급은 이 충성을 더 강화하기 위해 1760~70년대 자유와 평등이라는 놀랄 만큼 유용한 도구를 찾아냈다.
자유와 평등은 모두에게 자유와 기회를 제공하여 부의 평등을 이룰 수 있다는 이미지를 확실히 구축하여 그들의 지배 구조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미국에 대한 의문이 늘 있었다.
미국은 세계를 호령하는 잘 사는 나라인데 거리엔 노숙자가 흘러넘치고 병원의 문턱은 왜 그리 높은 건가?
복지수준은 왜 우리나라보다 못할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야 알겠다.
미국은 지금도 하층민은 열외되고 상층계급과 중간계급이 만든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이란 하층민의 불평등을 해결하는 도구가 아닌 기득권의 지배를 공공히 한 든든한 도구라는 것이 확실히 증명된 셈이다.

아메리카에서 자본주의가 자리 잡는 과정 속에 백인 빈민과 흑인 노예들이 연대하며 삶을 함께 도모하려 했다는 사실이 참 인상적이었다.
물론 많은 장치들에 걸려 그들의 연대는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에게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의 씨앗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이미 인종주의에 젖은 나로서는 그들의 연대를 상상하기 어렵다.
아니 상상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에서 자본주의를 걷어내면 다른 것이 보인다는 것도 재밌다.
자본을 역사적으로 공부한다는 것은 자본이 아닌 인간이 관계 맺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세세히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과정을 들여다 보는 것이 나를 알기 위한 역사 공부 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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