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에 시사하는 유럽 에너지 정책의 명암

유럽 대륙을 휩쓴 전력난: 독일 탈원전 정책이 불러온 예측 불가능한 혼돈

최근 유럽은 유례없는 전기 요금 상승과 전력 수급 불안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서로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는 단순히 에너지 부족을 넘어선 복잡한 지정학적, 경제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독일의 과감한 탈원전 및 재생에너지 전환 정책이 이러한 혼란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전 세계 에너지 정책의 방향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유럽 전력망의 복잡한 흐름과 에너지 전환을 고심하는 전문가의 모습

유럽 전력망의 상호 연결성과 독일의 선택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독특하게도 각국의 에너지 믹스는 자율적으로 결정하되, 전력망은 하나의 거대한 그리드로 통합하여 운영합니다. 이는 이론적으로 남는 전기를 이웃 나라에 보내고, 부족할 때는 사다 쓸 수 있는 효율적인 시스템입니다. 과거에는 석탄 발전이 주를 이루는 동유럽 국가들, 원자력 발전 강국인 프랑스, 그리고 수력 발전이 풍부한 북유럽 국가들이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안정적인 전력 수급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강력한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며 석탄 발전과 원자력 발전 비중을 대폭 줄이고, 태양광과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 비중을 60% 이상으로 확대했습니다. 독일은 이를 통해 ‘탈탄소 모범 국가’라는 명성을 얻고자 했지만, 이는 예상치 못한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그들이 간과한 것은 재생에너지의 치명적인 단점인 ‘간헐성’이었습니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예측 불가능한 전력 시장의 혼란

태양광과 풍력 발전은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크게 변동합니다. 낮에 햇볕이 강하거나 바람이 잘 불 때는 전기가 과잉 생산되어 오히려 마이너스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이웃 나라들은 값싼 독일 전기를 사다 쓰게 되지만, 자국 발전소들은 경제성을 잃고 가동을 중단하는 악순환이 발생합니다. 문제는 겨울철 ‘둔켈 플라우테(Dunkelflaute)’처럼 해가 짧고 바람이 없는 날이 지속될 경우입니다. 이때는 독일 내 전력 생산이 급감하고, 결국 이웃 나라에서 비싼 값에 전기를 수입해야만 합니다. 이는 전력 시장의 도매 가격을 교란하고, 전체적인 전기 요금 상승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실제로 노르웨이,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풍부한 수력 발전으로 인해 전기 요금이 저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독일로의 전력 수출이 늘면서 자국 남부 지역의 전기 요금이 북부에 비해 최대 180배까지 오르는 기현상을 겪었습니다. 국민들의 불만은 물론, 생산 원가에 직결되는 기업들의 고통도 커져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해저 케이블 용량을 제한하거나 신규 프로젝트를 취소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습니다. 하지만 EU 집행 당국은 이를 ‘경쟁법 위반’으로 간주하며 제지했고, 이는 유럽 전력 연계의 딜레마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전기 요금 부담 속에서 불을 끄는 손, 유럽 에너지 위기의 일상적인 모습



프랑스의 ‘탄력 운전’ 원전: 숨겨진 유럽 전력망의 버팀목

독일의 재생에너지와 프랑스 원전이 공존하는 유럽 에너지 흐름 개념도

이러한 상황에서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의 역할입니다. 프랑스는 전체 전력 생산의 70% 이상을 원자력 발전으로 충당하는 대표적인 원전 강국입니다. 특히 프랑스의 원전은 ‘탄력 운전’이 가능합니다. 이는 전력 수요에 따라 원전 출력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기술로, 통상적으로는 천연가스 발전소에서나 가능한 유연성을 원전에서 구현한 것입니다. 프랑스는 1980년대부터 이 기술을 발전시켜 왔으며, 낮에는 출력을 줄이고 밤이나 전력 수요가 많을 때는 출력을 높여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합니다. 이는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를 보완하고, 유럽 전력망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독일은 이러한 프랑스 원전의 ‘버퍼’ 역할을 암묵적으로 인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국 내에서 재생에너지를 대폭 늘려도, 부족할 때는 이웃 프랑스의 값싸고 안정적인 원전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 국영 전력 회사(EDF)에 막대한 손실을 안겼습니다. 독일의 마이너스 가격 전기가 유입되면 EDF는 제값을 받고 전기를 팔 수 없어 수익성이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프랑스는 ‘발전 차액 지원제’를 도입하여 시장 가격 변동으로부터 자국 발전소를 보호하는 조치까지 취했습니다. 이는 독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자국의 에너지 주권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한국 에너지 정책의 새로운 방향: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조화

한국 에너지 전문가가 유럽의 전력난과 한국의 안정적 에너지 정책을 비교 분석하는 모습

유럽의 이러한 사례는 한국 에너지 정책에 중요한 교훈을 제시합니다. 우리나라는 에너지 ‘섬’ 국가로, 주변국과의 전력망 연계가 제한적입니다. 따라서 유럽처럼 이웃 나라에 기대어 전력 수급의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어렵습니다. 과거 국내에서도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있었지만, 최근 정부는 ‘원전과 재생에너지는 함께 갈 수 있다’는 명확한 정책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김성환 기후 에너지부 장관은 한국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차세대 원전은 ‘탄력 운전’ 기술을 설계 단계부터 반영하여 재생에너지와의 궁합을 높일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원전이 전체 전력의 약 30%를 생산하며 기저 발전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사례처럼 탄력 운전이 가능한 원전 기술이 도입된다면,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량이 줄어드는 시간대에 원전 출력을 높여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무탄소 에너지원인 원전이 재생에너지의 단점을 보완하며, 전체 에너지 믹스의 유연성과 안정성을 극대화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해상 풍력 발전과 같은 고비용 재생에너지 프로젝트에 대한 신중한 접근도 필요합니다.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AI 산업 육성 등 미래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값싸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인 친환경 에너지 전환보다는 한국의 지리적, 경제적 특성을 고려한 현실적인 에너지 믹스 전략이 요구됩니다. 원전 업계에서는 기존 경직성 원전 30%, 탄력 운전 가능 원전 10%, SMR(소형 모듈형 원전) 10%를 통해 총 50%의 원전 비중을 가져가는 것이 최적의 에너지 믹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지속 가능한 에너지 미래를 위한 현명한 선택

유럽의 전력 대란은 에너지 정책이 단순히 환경 보호의 관점에서만 접근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너지 안보, 경제성, 그리고 전력망 안정성은 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독일의 경험은 급진적인 에너지 전환이 이웃 국가들에게까지 예상치 못한 부담을 안길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한국은 유럽의 사례를 거울삼아, 무탄소 에너지원인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상호 보완적으로 활용하는 균형 잡힌 에너지 정책을 추진해야 합니다. 특히 유연한 운영이 가능한 차세대 원전 기술 도입은 재생에너지 확대와 병행하여 안정적인 전력 수급을 확보하는 데 필수적인 전략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다양한 선택지 속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길을 찾아나가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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