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배층 관점에서 다시 보는 조선
조선 vs 일본, 피지배층의 삶을 비교하다
이번 시간에는 피지배층 관점에서 다시 보는 조선 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조선과 일본, 과연 어느 나라의 농민이 더 인간답게 살았을까요? 한국의 역사학자 황현필 강사는 기존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반기를 들며, 조선 농민의 삶이 일본보다 낫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이 글에서는 황현필 강사의 주장과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조선과 일본의 농민을 다각도로 비교하여, 우리가 알고 있던 조선과 그가 새롭게 주장하는 조선의 차이를 살펴보려 합니다. 동시에 이 비교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과연 조선에 대해 얼마나 오해하고 있었는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하고자 합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하는 기반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자긍심을 가질 수도 있고, 반대로 자책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황현필 강사의 주장은 단지 과거를 복권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역사 인식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 농민의 삶을 중심으로 한 이 비교는 자학사관에서 벗어나 민중의 실질적인 삶을 되짚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1. 통치 철학: 민본 vs 수탈
조선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민본(民本) 사상을 실현하려는 중앙집권 국가였습니다. 왕은 지방에 관리를 파견해 백성을 보호하려 노력했고, 탐관오리에 대한 감찰 제도도 엄격했습니다. 국왕은 백성을 하늘같이 여기는 교서를 내려 통치를 정당화했으며, 세종, 정조, 영조 등 다수의 성군은 실제로 애민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각종 정책을 펼쳤습니다.
반면 일본은 쇼군과 다이묘의 연합 통치 구조로, 각 지역 영주가 사실상 농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백성이 죽지도 살지도 않게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으로 수탈을 정당화했으며, 이는 일본 농민의 삶이 생지옥 같았던 이유입니다. 조선은 제도적으로 백성을 보호하려 한 국가였던 반면, 일본은 실질적으로 권력자들이 자의적으로 백성을 지배하던 사회였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2. 신분 상승 가능성
조선은 양천제 사회로, 과거 시험을 통해 양반으로 신분 상승이 가능했습니다. 문과 급제자 중에도 신분이 낮은 이들이 많았다는 자료는 조선이 능력 중심 사회였다는 증거입니다. 과거 제도는 명목상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으며, 실제로 많은 평민과 중인 계층이 이를 통해 입신양명을 이루었습니다.
반면 일본의 농민은 거의 신분 상승이 불가능했습니다. 사무라이 계층에 편입되려면 군공을 세워야 했으며, 대부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농민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신분의 고착화는 사회 전체의 유연성과 공정성을 해치며, 이는 일본의 농민이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억압당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3. 세금 제도: 절대적인 차이
조선의 토지세는 세종대왕 시기 연분9등법 도입으로 최대 20두, 이후 4두로 낮아지는 등 백성을 위한 절세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연분9등법, 전분6등법, 대동법, 균역법 등 일련의 제도들은 국가가 백성의 생활을 보장하고자 지속적으로 제도를 조정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영조는 군포를 줄이고 대신 어염세나 잡세 등 간접세를 도입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이려 노력했습니다.
반면 일본은 농민의 수확량의 50~70%를 수탈했으며, 7할을 영주가 가져가고 3할만 농민이 먹는다는 ‘칠공삼민(七公三民)’ 관행이 존재했습니다. 이는 조선 농민의 세금 부담이 일본보다 훨씬 낮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조선은 국가가 세율을 조절하며 생계를 보호했지만, 일본은 영주가 재량껏 세율을 정해 수탈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삶은 훨씬 고달팠습니다.
4. 식생활과 영양 상태
조선 농민은 평균적으로 많이 먹었습니다. 조선인들이 일본인보다 세 배는 더 먹는다는 일본인의 기록이 있으며, 실제로 새참, 고기, 국 등이 풍부했습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풍성한 밥상과 함께 여유롭게 식사하는 모습이 자주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문화적 이미지가 아니라, 생활수준이 일정 이상 유지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반면 일본의 농민은 백미에 반찬이 부족해 각기병에 시달렸고, 도시는 위생 문제로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초밥이 흰쌀밥에 생선 한 점을 얹은 형태로 발달한 것도 이러한 식생활의 제약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조선은 반면 농업 기반이 튼튼했고, 농민도 자영농이 많아 생계 유지에 있어 일본보다 나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5. 평균 키와 건강 상태
조선 남성의 평균 키는 161cm, 일본은 154cm로 약 7cm의 차이가 납니다. 이는 영양과 생활수준의 차이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외국인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은 체격이 크고 건강했으며, 도덕적으로도 안정된 삶을 살았습니다. 하멜, 비숍, 오페르트 등 외국인의 기록에 조선인의 외모와 건강, 도덕성을 칭찬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히 신체적 조건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얼마나 국민의 삶을 보호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간접적인 지표이기도 합니다. 식습관, 주거 환경, 위생 상태, 사회적 불안 요소 등 모든 지표에서 조선은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6. 거주 이전의 자유
조선 농민은 신고만 하면 이주가 가능했으며, 거주 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었습니다. 심지어 노비조차도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면 자유민이 될 수 있었고, 돈을 모아 납속하거나 주인의 허락을 받아 양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유럽의 농노제와도 차별화되는 부분입니다.
일본 농민은 다이묘에 예속된 농로로 거주지 이탈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도망시 적발되면 사형까지도 당했습니다. 거주 이전은 단순한 이동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와 인권에 대한 문제이며, 이 측면에서 조선 농민은 훨씬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7. 반란과 저항의 기록
500년 조선 왕조 동안 발생한 농민 반란은 약 1,400건입니다. 에도 막부 약 250년 동안 일본에서는 3,000여 건의 농민 반란이 발생했습니다. 반란의 수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당시 농민의 삶의 고통도를 나타내는 간접 지표입니다.
농민 반란은 단순한 생계난의 반영이 아니라, 체제의 억압과 불공정함에 대한 반응입니다. 조선은 제도적으로 민원 제도, 상언 제도, 격쟁 등의 장치를 통해 민의 표현을 허용했습니다. 반면 일본은 하극상 자체가 중대한 죄로 여겨졌기 때문에, 민중의 불만이 표출될 수 있는 창구가 매우 협소했습니다.
조선의 피지배층은 진짜 헬이었나?
물론 조선도 완벽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세도정치, 부정부패, 천민 차별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과의 비교에서 조선은 피지배층이 그나마 인간답게 살 수 있었던 체제였습니다. 조선은 과거 시험이라는 통로를 열었고, 절세 정책으로 농민을 보호했으며, 국왕은 민본 사상을 실천하려 노력했습니다.
조선을 ‘헬조선’으로 묘사하는 담론은 대체로 19세기 말의 조선만을 조명하거나, 식민지 근대화론의 관점에서라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조선 전체 500년을 두고 본다면, 조선은 실질적으로 백성을 위한 제도와 철학을 유지해 왔던 국가였습니다.
결론
대식가라 소문났던 한국인, 조선 농민의 삶은 일본의 농민보다 인간적이었습니다. 왕은 애민 정신을 강조했고, 백성의 삶을 돌봤습니다. 황현필은 국뽕이나 일본에 대한 감정적 비판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근거에 기반하여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익히 보아오던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조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조선을 바라봐야 할 시점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자학사관을 벗어나 구체적인 역사적 근거를 기반으로 조선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조선은 단순히 낡은 국가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체제와 제도를 지향했던 이상적인 모델의 하나였습니다.
과거를 바로 보는 것이야말로 미래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입니다. 이제는 조선을 단지 불쌍한 나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백성을 위해 끊임없이 애쓴 국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해야 할 때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피지배층 관점에서 다시 보는 조선 에 대해 이야기해보았습니다. 또 다른 주제로 다음 시간에 찾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