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베트남 남북 갈등의 숨겨진 민낯 에 대해 알아 보려 합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벌써 50년이 흘렀습니다. 한때 참혹한 전쟁터였던 이 나라는 이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대국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하노이와 호치민, 북과 남의 대표 도시는 고층 빌딩과 외국계 기업으로 가득 차 있으며, 젊은 세대는 창업과 해외 진출을 꿈꾸며 글로벌 무대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눈부신 발전 이면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깊은 내상이 존재합니다. 바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는 베트남 내부의 뿌리 깊은 지역 감정입니다.
감춰진 금기: 드러나지 않는 지역 갈등
표면적으로는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베트남 내 지역 갈등은 여전히 강한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공식 석상이나 공공의 자리에서는 서로 조심스럽게 감정을 숨기지만, 같은 지역 출신들끼리 모이면 상대 지역에 대한 불만과 조롱이 흔하게 오갑니다. 이처럼 지역 감정은 마치 사회적인 금기처럼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일상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구조적 문제입니다.
북부의 수도 하노이는 정치와 전통, 학문의 중심지로 보수적이고 체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 남부 호치민은 경제 중심지로 실용적이고 개방적이며 창의적인 분위기가 강합니다. 하노이 사람들은 부를 감추고 점잖은 태도를 지향하는 반면, 호치민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의 풍요로움을 표현합니다. “하노이는 내일을 위해 살고, 호치민은 오늘을 위해 산다”는 속담은 이러한 문화적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경제 인프라부터 갈등의 불씨가 되다

1990년대 중반, 베트남은 원유를 수출하면서도 정제된 석유를 외국에서 수입하는 모순된 구조에 있었습니다. 정유 공장 건설은 시급한 과제였고, 정부는 중부에 이를 세워 북부 경제를 지원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남부 지역은 이를 강하게 반대하며 갈등이 격화되었고, 결과적으로 공사는 10년 넘게 지연되었습니다. 단순한 경제 논리가 아닌, 지역 균형을 둘러싼 정치적 충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경제 인프라 조차 지역 감정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대표 브랜드들이 상대 지역 진출에 실패하거나, 사업 확장에 있어 지역 간 편견이 걸림돌이 되는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사업, 커피, 결혼까지… 일상 속 감정의 그림자
북부의 유명 보석 브랜드 바오 민 조우는 하노이 중심으로, 남부의 PNJ는 호치민 중심으로만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커피 프랜차이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노이 기반의 ‘A 카페’는 남부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호치민 기반의 ‘파스오 커피’는 북부 확장에 제한을 받습니다. 이는 단순한 마케팅의 실패가 아니라 소비자의 지역 감정이 뿌리 깊게 작용한 결과입니다.
결혼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노이 남성과 호치민 여성 간의 결혼은 가족의 강한 반대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북부 남자는 인색하고 권위적이라는 인식, 남부 여성은 사치스럽고 가정적이지 않다는 편견은 양가 부모의 판단을 좌우합니다. 일부 커플은 이로 인해 결혼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세대가 젊어질수록 이러한 벽이 무너질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현재로선 여전히 현실의 장벽으로 작용합니다.
지역 감정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단절
베트남의 지역 감정은 단지 문화나 성격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오랜 역사적, 정치적, 민족적 분열에서 기인합니다. 북부는 천년 넘게 중국의 지배를 받아 유교 중심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반면 남부는 참파 왕국과 프랑스 식민지, 미국의 영향을 받으며 실용적이고 자유로운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이후 프랑스 식민 시절에는 베트남을 북부-중부-남부로 나누어 통치했으며, 1954년에는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다시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처럼 베트남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살아온 시기는 100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북부와 남부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다른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언어, 종교, 피부색까지 다른 남과 북
언어적으로는 같은 베트남어를 사용하지만, 북부와 남부 방언은 크게 다릅니다. 방송에서는 북부 방언이 사용되지만, 일상에서는 남부 억양이 더 일반적입니다. 서로의 억양을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풍조도 존재합니다. 북부 사람들은 남부 억양을 나약하다고 비하하고, 남부 사람들은 북부 억양을 촌스럽고 과장되었다고 여깁니다.
민족과 종교 구성도 다릅니다. 북부는 대부분 베트족이고, 불교와 유교적 성향이 강한 반면, 남부는 크메르족, 참족 등 다양한 민족이 혼재되어 있으며, 가톨릭·이슬람·힌두교 등 종교도 다양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피부색과 외모에서도 나타납니다. 북부 사람은 피부가 밝고 체구가 작은 편이며, 남부 사람은 햇빛에 많이 노출되어 피부가 더 까무잡잡하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사이공이라는 이름에 담긴 상처와 저항
남부 최대 도시인 호치민시는 원래 사이공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통일 후, 북부 공산 정권은 남부의 수도 이름을 북부의 혁명 지도자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많은 남부 사람들은 여전히 이 이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사이공’이라는 옛 이름을 고수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베트남 내에서도 “사이공이 돈 벌어 하노이를 먹여 살린다”는 비아냥이 오갑니다.
이처럼 도시 이름조차 지역 감정의 핵심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는 역사적 상처의 기억을 현재까지 이어지게 만듭니다.
전쟁 이후 화해 없는 통일, 그 후유증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끝났지만, 전후의 화해 과정은 전무했습니다. 오히려 남부는 강제로 공산화되었고, 남베트남군, 관료, 지식인 수십만 명이 재교육 캠프에 보내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사법 절차 없이 처형되거나 강제 이주 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남부 사람들의 분노와 불신은 더욱 깊어졌고, 오늘날까지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북부가 전후 복구와 경제 운영을 장악한 가운데, 남부는 사실상 패배자로 낙인 찍혀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경험은 현재의 지역 감정의 토대를 형성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축구가 만든 기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화합과 단결의 가능성을 보여준 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박항서 감독이 이끈 축구 국가대표팀이 동남아 대회에서 우승한 사건입니다. 북부와 남부 출신 선수들이 함께 뛰고, 국민이 하나 되어 응원했던 그 장면은 베트남 사회에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통일은 박항서가 이뤘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스포츠가 가진 힘이 단순한 승부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베트남의 진짜 성장 과제
베트남은 세계적인 제조국가로 성장하며 글로벌 무대에서 존재감을 넓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 성장만으로 진정한 국가 통합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베트남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이 오래된 지역 갈등을 해소해야 합니다.
정부는 문화 교류, 세대 간 이해 증진, 교육과 미디어를 통한 인식 개선 등 다양한 접근을 시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진정성 있는 화해가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디라 간디의 말처럼, “주먹을 쥔 채로는 악수할 수 없다”는 진리를 이제는 베트남이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남북은 하나의 국가라는 정체성을 공유해야 합니다. 정치적 통일은 이루었지만, 사회적 통합은 아직 멀었습니다. 이제는 마음의 통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작은 관심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베트남 남북 갈등의 숨겨진 민낯 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더욱 유익한 정보로 다시 찾아 오겠습니다.